Wednesday, December 8, 2010

국민교육헌장

Turn the clock backward to 1968.12.5.  
국민교육헌장 반포 (http://www.youtube.com/watch?v=VO1HcYVwxGo&feature=related)

저의 기억도 김윤태교수님과 그리 다르지 않군요..  제가 몇 년 후배이지만...
좋던 싫던, 역사의 한 패이지로 남아있으리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짜피 모순덩어리 인것을............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2005/02/021003000200502020546017.html

▣ 김윤태/ 한신대 연구교수·국문학 windor2@hanmail.net

전무후무하게 박정희 시절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국가 시책들이 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정책들은 다양한 구호와 슬로건으로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인구 절반 이상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채 공적·사적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해야 했던’ 시절의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 현상을 여덟 가지 열쇳말로 복기해봤다. 편집자

기억 하나. 초등(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반포됐다면서, 무조건 외우란다. 다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엄포 속에서. 덧붙여 그분의 아들은 30분 만에 다 외웠다는 비교를 당하면서, 몇몇 아이는 머리 나쁜 놈이라는 난데없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어려운 말들을 외워야 했다. 그 뒤로도 ‘헌장’은 각종 시험의 단골 메뉴가 돼 우리를 지치게 했다. 삼백 몇자나 된다는 ‘헌장’의 나머지는 제대로 암송되지 않지만, 첫머리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은 아직도 생생하다. 참으로 우린 대단했다. 날 때부터 그런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니. 그럼에도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보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머리는 쫌 난 편이었는지, 담임 선생님이 애들앞에서 암송시킨 기억이 남. 첫 문장은 아마도 주글 떼 까지 안 잊혀 지리라)


기억 둘.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합창단을 급조하더니 노래 연습으로 수업도 폐지했다. 합창단에 못 낀 대부분의 아이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연일 환영 연습을 했다. 역사적 개통식날 대통령께서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간다고 하여 연변으로 몰려나가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행여 대통령의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잔뜩 기대했으나 까만 승용차 몇대가 휑하니 스쳐지나가는 걸로 끝나버렸다.  허탈했다. 뭐하자고 어른들은 우릴 고속도로가로 내몰았을까. 귓가엔 라디오만 틀면 나오는 수많은 유사 ‘경부고속도로가’들의 멜로디만 웅웅거렸다.
(I was too young to remember this event. But 아이들, 학생들 강제동원이야 비일 비재. 장학사 방문한다고 단채로 교실 마루를 왁스와 마른 걸래질로 '광'내던일....)

기억 셋. 중학교 시절이다. 퇴비증산운동, 유실수심기운동 하는 것들이 한창이었다. 가을도 아닌 봄철에 알밤을 구해 학교로 가져가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밤나무 묘목을 조성한다는 건데, 우리들은 돈을 구해 종묘상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비국민으로 몰릴 분위기였기에.... 나를 더 괴롭힌 것은 퇴비증산운동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산과 들로 나가 풀을 베어와야 했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소도시의 까까머리 중학생이 얼마나 낫질을 잘하겠는가. 하루 1인당 할당량이 5kg인가 그랬는데, 낫질이 서툰 나로서는 엄청난 고역이었다. 팔과 다리를 온통 풀에, 낫에 베여가며 우리 몸피보다 더 많은 양의 건초를 장만해야만 귀가가 허락됐다. 
(좀 다르지만, 폐품수집운동, 고철수집운동 등이 기억남...  잰장, 뭐 쓸만한 물건도 없는데 하물며 폐품이야. 있으면 버얼써 엿 바꿔 먹었지.. 폐품을 문방구에서 팔았음. 아마도 엿 바꿔 먹은 것들을 고물상에서 사오지 안았을까?? ㅋㅋ. 나같이 가난한 애들은 폐품도 못 가져가 몸으로 때움. 변소청소.... ㅠㅠ. 땅에 떨어져 있는 녹슨 못이라도 구해볼까, 온 동내를..)

기억 넷. ‘자유교양대회’란 게 있었다. 고전이나 양서를 정해 모든 학생들이 그걸 읽고 시험을 보고 독후감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하면 상을 주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행됐는데, 내가 두각을 나타낸 건 중학교 때였다. 나는 학교 선발로 뽑혀 몇 주간 수업도 빠지고 책들만 내리 읽어야 했다. 당시 난 그 지루하고 엄청나게 긴 소설 '로빈슨 크루소' 나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을 무려 5번인가 읽었다. 덕분에 시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도 대회까지 나가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도 대회나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30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지쳐버렸다. 우리는 그걸 ‘강제교양’이라고 불렀다. 그 짓은 고교 시절까지도 이어졌는데, 언제쯤 그 대회가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 이져먹고, Booker T. Washington 만 희안하게 제목만 기억남...  언제고 한번 다시 읽어볼 기회가 있으리라.. 영어로.  어느정도 긍정적인 면도.... )


기억 다섯.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학도호국단이란 게 생겼다. 의무적으로 교련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우리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군인, 교장은 연대장, 교사들은 교관이었다. 3개 학급씩 하나의 중대가 됐고, 한 학년은 하나의 대대였다. 전교생은 연대 병력을 이루었고, 덩치 좋고 목청 큰 학생들은 학생 연대장-대대장-중대장으로 뽑혔다. 문약했던 나는 문화부장인지 뭔지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정받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했다. 우리는 3년간 거의 날마다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익혀야 했다. 
(해마다 교련검열을 받아 통과하려면, 학교는 비상사태에 돌입. 한달정도 매일 행진연습, 총검술등을 연마했죠... 연대장님도 교관들도 애가 탓으리오. 공부시켜서 한 놈이라도 더 대학보내야 하는데.....)

기억 여섯. 대학교에 들어가서다. 여전히 학교는 병영이었다. 대학 교련은 1주일에 4시간씩 필수과목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간신히 길렀던 머리를 박박 밀고 문무대라는 곳으로 군사훈련을 가야 했다. 거부하면 곧바로 학적이 변동돼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의무사항이었다. 그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온 어느 날 고향 친구랑 서울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훈련 때문에 아주 단발이었으나 친구는 당시 유행대로 장발이었다. 친구가 갑자기 내 옆에서 사라졌 파출소 2층으로 끌려가 머리를 잘렸다. 친구는 쥐 뜯어먹은 듯한 머리 모양새를 하고서야 구금에서 풀려났다. 친구가 풀려나던 저녁 6시, 거리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소리 나는 곳을 응시했다. 

(일학년때 문무대 일주일, 그리고 이학년때 전방부대 일주일. 누구의 은덕이었는지, 다행이 머리는 무사했음.)

2 comments:

  1. 모두 경험했던 일 들 이네요. 지금 생각하면 픽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는.

    근데...한타가 많이 느신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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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 bet you did (모두 경험). After all, these become a memoir of our lives.
    As you can tell, most of the text here is from the link (김윤태). Actually I tend not to use Korean too much. The reason is the limitation of my language capability. Once I use Korean too much, my brain does not turn into English mode easily, making my English more broken. Not good for my jo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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